드디어 보육사업 생활 정년이 되었습니다
내 나이 27세 청년 처녀 시절에 작은 개척교회에서 목사님께서 선교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교육파트를 맡고 있는 내게
맡아서 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주일학교에서 유치부 교사는 했지만 유치원 계통은 해 보지 않아 자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것은 아니니 잘 도와 주시겠다고 하며 교회 반주자 젊은 여집사님과 함께 시작하게 되였습니다
어린아기를 낳은지 얼마되지 않은데 남편의 벌이가 적어 젊은 여집사님은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남양주 딸기원 동네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
개원을 계획하고 골목 골목 다니며 가가호호 방문하며 원아 모집을 매일 하러 다녔습니다
여고시절 알바하던 기질을 발휘하여 부끄러워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모집하여 처음부터 그 동네에서
20여명이 넘는 아이들이 모집되었습니다
1982~1985년 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침 신학교 동기가 신설동에 위치한 큰 교회 시무하고 있어서 교회 유치원을 찾아가 조력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교회 유치원 선생님으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정보를 받아 신설동에 있는 보육사를 찾아가서 보육 커리큘럼 책이라고 단 1권의 책을 구입하여
시작된 것입니다
그림자료도 보조 책도 없는 시절
그 당시 유치원은 커리큘럼이 단 1권이었습니다
다행히 보육계 거장인 김신자교수의 유치원 율동 음악책과 녹음테잎이 보육사에 나와있어 구입하였습니다
밤이 새도록 음악을 틀고 스텝과 안무를 연구하여 나름대로 율동을 익혔습니다
다행히 신학을 교육과를 거처 신학과를 다녔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5~7세 아이들의 선교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유롭게 놀다가 피아노 행진곡 음률에 맞추어 한줄로 행진하다가 둥글게 모여 율동을 합니다
때론 피아노 선생님이 못나오면 목사님께서 피아노를 쳐 주시고 성경 이야기를 들려 주며 선교원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음해 좋은 소문이 나서 60여명의 아이들이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장소가 협소하여 교회 의자를 밀어 붙여 놓고 공간을 확보하여 가르치다가 교회 뒤쪽에 가건물을 지었는데
비가 오면 천장에서 비가 쏟아져 큰 다라로 물을 받아가며 보육하였고
차가 없던 시절이라서 귀가 할때엔
길 건너편에 있는 아이들은 교사 둘이서 나누어 집으로 데려다 주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주간교육 계획안은 일주일에 한번씩 기름종이에 글을 써서 가리방으로 인쇄를 하여 손톱이 매일 먹물로 까맣게 물들었습니다
돈 보다는 소명감으로 일하던 시절
보수는 작아도 좋아하는 아이들과 모여 교육을 하게되니 매일 기쁘게 하루하루 보냈습니다
아이들이 많아져 보육료 수입이 예상보다 많아지니 교회 당회와 함께 일했던 반주교사와도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난 어느 순간에는 그만 두어야 하나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소명감으로 참고 견딜수 있었습니다
참고 근무를 하던중 3년이 다 되어 갈 무렵 12월이 되었습니다~
교회 학생부를 맡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통해 시험이 왔습니다
한 여학생이 들어 왔는데 몸집이 크고 학생들에게 영향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웬지 내게서 반대 편에 서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결국은 예상한 느낌이 어느날 너무나 크게 다가 왔습니다
그 여학생과 학생회장과 임원들과 함께 와서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동네 빵집에 함께 가서 대화를 하는데 평소 순종을 잘하고 그 순하디 순한 학생회장이 대표로 불만을 말했습니다
"전도사님은 교회 당회에 영향력 힘이 없어서 우리 학생회 필요한 것들과 예산을 많이 받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전도사님이 노처녀라서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갑자기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이 떨리고 입술이 바짝 말라서 컵에 물을 마시려고 들었는데
손에 든 컵이 덜 덜 떨고 있는 내 손을 보았습니다.
무슨 정신으로 교회에 돌아 왔는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교회에 들어와 목사님께 있었던 일을 말씀 드렸습니다
주의 종에게 "노처녀~" 란 말을 하다니 하며 학생 회장과 임원을 불러서 노발 대발 하며 훈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이 교회를 떠나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아래지방 부산쪽에 요양원 시설에 매일 예배를 드려주며 상담해주는는 교역자를 구한다고 요청이 들어왔는데
아직 어른 상대로 예배를 매일 드릴 자신이 없었던 나는 자신이 없어 거절하였습니다
강원도 산골에 교육전도사를 구하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한번도 먼 지방으로 가 본적 없는 나는
타지 라서 내심 겁은 나지만 호기심도 나고 친구와 가보자고 하며 탐방하게 되었습니다
소양호 배를 타고 1시간 넘어 도착한 곳 배에서 내려서 시내 버스를 타니 구불구불 산골을 지나 가는데 가는 길이
너무나 시골이었습니다. 한참 후에 도착하는 곳은 제법 읍내로 도착하게 되고 물어물어 간 곳은 산 중턱에 있는 교회
였는데 계단을 한참 올라 갔습니다 한 계단마다 발을 언저 놓을때마다 발의 무게가 참 무겁다고 느껴졌습니다
가족을 떠나 이 먼 곳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곳에 어떻게 지낼 수 있으랴~
하룻밤 잠을 자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 낮선 곳에 올 자신이 없었습니다
며칠후 목사님께서 갑자기 짐을 실은 화물차를 보내셨다고 짐 부터 먼저 보내라고 통보 하셨습니다
가방에 간단한 옷가지와 혹시나 하고 선교원에서 사용했던 기타를 먼저 화물차에 실어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산골 교회에 왔는데
생각과 달리 주일학교에 많은 교사와 주일에는 많은 성도가 있고 체계가 있는 당회원과 행정~
잘 구조화된 건물과 유치원 시설~
교회 뒤 편은 아름다운 숲과 나무와 공원. 전설같은 박수근 화백의 동상
마치 천국에 와 있는 느낌 이었습니다
교회에 사찰 집사님이 계셔서 내 방의 연탄불도 봐 주셨습니다
선교원 생활의 무게를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이 곳에 새로 건축한 유치원에 주임 교사 자리가 비어있었던 것입니다
또다시 목사님의 권유로 유치원을 맡게 되었습니다
순종을 잘하는 교사 2명과 80명의 원아
뒤에서 잘 돌봐주는 유치원 이사님들과 당회원
무엇보다도 새로 지은 유치원 건물은 넓은 유희실과 다락방같이 짜여진 2층 공간은
아이과 교사들의 꿈의 천국 같은 곳이었습니다
매주 기도로 무장 되어있던 내 생활이 점차 약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곳에서 학생회 전통으로 내려오는 "밷엘의 밤"을 진행하면서 햑생회 교사로 있었던 청년회장과 가까워지고
이 일로 다시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후에 혼인하여 두 자녀를 두었는데 지난 달 손주를 보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또다시 선교원을 맡아 운영하게 되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도우러 강원도 산골에 내려왔다가
어린이집을 세우게 되어 25년간 보육을 하면서
많은 연단과 시련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정년의 나이가 되어 21년 7월 부터 나의 인건비 지원이 끊어 진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인건비로 많은 축복을 누렸지만 그 때문에 보육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고백합니다
단 돈 오만원 받고 선교원을 시작했던 시절~
아이를 보내 주는 것도 고마운데 돈까지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음을 고백합니다
정년 후의 생활은 주님의 손에 있음을 주님께 부탁드립니다
보육을 하는 동안 내 가산이 늘어 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많았지만 언제나 재정은 하나님께 우선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내 쓸 것은 언제나 준비가 된 재정이 있었습니다
주님!
지금까지 일을 하게 해 주신것 감사합니다
혹시 내가 어려워져서 소명감을 잃지 않지 않도록 내 생활을 채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잠자는 곳 먹는 것 내 최소한의 생활을 잘 유지 하다가 하나님 품에 안기게 하옵소서~~